Snowfall in April

노만 록웰: 혼인신고 (1955)

마하로바 레이 2023. 5. 2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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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신고 Marriage License, 1955

Norman Rockwell

Saturday Evening Post 표지

 

"결혼!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민태원 선생의 수필 "청춘 예찬" 첫 문장에서 '청춘'만 '결혼'으로 바꿔봤습니다. 효과가 그다지 없는 것 같군요. 가슴 설레임에 대해서라면 청춘과 결혼은 유사어가 아니라 반대어인가 봅니다.

청춘들은 '청춘'이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가슴 설레지 않지요. 나이가 좀 들어야 그런 말을 들으면 가슴도 설레고 부럽기도 합니다. 결혼은 그 반대가 아닌가 싶군요. 결혼 전에는 가슴도 뛰고 그러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면 그런 말을 들어도 별로 가슴 설레지 않습니다.

가슴이 설레는 건 기대 때문이겠습니다. 좀 과장하면 환상 때문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디 세상이 그렇습니까? 살다보면 기대와는 상관없이 벼라별 일을 다 겪게 됩니다. 환상은 시들고 '에구, 팔자야' 소리까지 나옵니다.

결혼이 뭐, 그런거지요. 환상도 가졌다가, 치고 받고 싸우기도 했다가, 마침내 덤덤해 져서 가끔씩 눈 마주치면 씨익 웃는 거지요. 노만 록웰이 그린 결혼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록웰이 환상을 무시했다는 건 아닙니다. <혼인신고, 1955>를 보면 압니다.

 


참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과 폐백(?)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곧바로 동사무소로 왔습니다. 혼인 신고를 하기 위해섭니다. 두 사람의 표정은 진지하면서도 행복에 달떠있습니다.

사실 결혼 그림이라면 뭐니뭐니해도 결혼식장 풍경이 전형입니다. 제비꼬리 양복을 멀쑥이 차려입은 신랑과 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신부가 주례 앞에 나란히 서서 "네" 하는 모습 말이지요. 그런데 록웰은 결혼에 대한 그림을 적지 않게 그렸으면서도 결혼식장 풍경을 그린 것은 단 한 점도 없습니다. 그나마 시간상 결혼식과 가장 가까운 그림이라면 <혼인신고>이겠습니다.

십수 점을 헤아리는 록웰의 결혼 그림 중에서 그나마 <혼인신고>가 환상과 낭만에 가장 가깝습니다. 창문 왼 옆에 붙은 일력을 보니까 결혼식은 유월 십일일이었습니다. 창밖을 보니까 야외촬영하기 딱 좋을 만큼 완벽한 토요일 오후입니다.

난로 연통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둥그런 벽시계의 시침은 세시와 네시 사이에 있습니다. 관공서가 토요일 오후 세시가 넘도록 문을 열었다는 건 참 이례적인 일입니다. 어쩌면 이 신혼부부가 사정사정했는지도 모릅니다. 신혼여행 떠나기 전에 혼인신고를 해야겠으니 문닫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혼인신고 받는 직원 할아버지로서는 거절할 처지가 못됐나 봅니다. 발칙한 신혼부부 때문에 토요일 오후를 고스란히 날리고 있습니다. 주말 오후라고 뭐 딱히 갈 데도 없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이런 어이없는 부탁을 받게 되면 꼭 중요한 술자리나 계모임이 생기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직원할아버지는 동사무소 앞 게양대에서 국기를 내려다 책장 꼭대기에 올려놨고 작업복은 벗고 와이셔츠 차림입니다. 근무할 때 신던 실내화를 벗고 잘 닦은 구두로 갈아 신었습니다. 이젠 창가 옷걸이에 걸어둔 상의만 걸쳐 입고 모자만 쓰면 됩니다. 퇴근 준비가 다 됐다는 뜻입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커플이 드디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혼인 신고서 작성에 폭 빠져버렸습니다.

글씨는 신부가 더 잘 쓰는가 봅니다. 남자가 부르고 여자가 씁니다. 여자는 꼿발까지 딛고서 한자 한자 칸을 채워나갑니다.

어두침침한 방은 신부의 노란 드레스로 화사하게 빛납니다. 신부의 드레스만큼이나 화사한 것은 두 사람의 얼굴입니다.

써나가는 혼인 신고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길은 진지하기 짝이 없습니다. 서로 눈길을 마주치면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겁니다.

그런데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신랑신부를 대하는 직원 할아버지의 표정이 생뚱맞습니다. 얼른보면 그냥 지루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두 사람 때문에 자기 토요일 오후가 무참하게 박살나고 있기 때문이지요. 날씨가 이렇게 좋다보면 신경질이 날만도 하겠지요.

하지만 잘 보면 단지 지루함이나 뾰로통한 것만은 아닙니다. 뭔가 상념에 잠긴 듯한 표정도 겹쳐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요?

"그래, 나도 느덜 만할 때는 그랬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막 결혼한 신혼부부를 보면서 자기 옛 모습을 떠올리는 건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온통 내 것 같았던 시절이 그에게도 있었을 겁니다.

신부와 함께 목사님 앞에서 "네"라고 한 다음, 지금은 작고했을 동사무소의 혼인신고 담당 할아버지에게 달려가서 신고서를 작성했었던 적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록웰의 자서전에 보면 이 혼인담당 직원 할아버지의 모델은 진짜로 시청 직원이었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그림의 모델이 되기 몇 달 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더랍니다. 이 그림에 나오는 직원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토록 신혼부부의 행복에 겨운 모습과 대조됐던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닌 지도 모르겠습니다.

신혼 부부의 모습은 혼인신고 담당 할아버지의 과거 모습이겠습니다. 그러면 이 할아버지는 신혼부부의 미래 모습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고 아닐 지도 모릅니다. 또 그렇다면 어떻고 아니라면 어떻겠습니까? 서로 몸을 착 붙이고서 부부로 새 출발하는 신혼부부나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직원 할아버지에게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 조각의 붉은 마음입니다. 어려운(?) 말로 일편단심이라고들 하지요. 이 그림에서는 그런 마음이 한 송이의 붉은 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꽃은 신혼부부만의 것도 아니고 직원 할아버지만의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꽃은 정확하게 신혼부부와 직원 할아버지의 얼굴을 있는 직선의 정 중앙에 그려져 있습니다.

세 사람 중에서 아무도 그 꽃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꽃은 거기에 있습니다. 이들이 작성하고 주고받는 혼인신고서는 그저 한 장의 종이쪼가리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송이의 붉은 꽃이 자라는 한, 그 종이쪼가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종이쪼가리일 것입니다.

평미레 드림/

6/6/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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